[조선왕릉-장릉] 단종애사, 국내여행, 여행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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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장릉] 단종애사


 500년이 넘는 조선왕조의 긴 역사 속에서 비운의 인물은 셀 수 없이 많다. 하지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비운의 인물을 꼽으라면 아마도 조선 제6대 임금 단종(端宗, 1441~1457년)이 아닐까? 그가 세상을 떠나고 500여 년이 흐른 뒤 춘원 이광수(春園 李光洙)는 단종 소재로 한 장편소설 《단종애사》를 통해 단종의 슬픔을 위로했다. 그가 잠들어 있는 영월장릉(寧越莊陵)은 남한에 남아있는 조선왕릉 40기 중 유일하게 수도권 밖에 홀로 떨어져 있다. 북한에 있는 태조비 신의왕후의 제릉(齊陵)과 제2대 임금 정종의 후릉(厚陵) 역시 개성에 소재하고 있으니 조선왕릉 42기를 통틀어도 유일하게 수도권 밖에 자리 잡고 있는 단종의 무덤이다. 그가 잠든 위치마저도 왠지 서글프다. 

                    
                

숙부에게 희생된 소년 국왕

  • 장릉에는 치열한 왕위다툼에 희생당한 어린 단종이 잠들어있다.

    장릉에는 치열한 왕위다툼에 희생당한 어린 단종이 잠들어있다.

제5대 임금 문종과 현덕왕후의 외아들로 태어난 단종은 어머니 현덕왕후가 자신을 낳고 3일 만에 산후통으로 세상을 떠나는 슬픔을 겪는다. 할아버지 세종의 배려로 세종의 후궁인 혜빈 양씨의 보살핌 속에서 자란 단종은 8살이 되던 1448년 왕세손에 책봉되었다. 하지만 말년에 갖가지 병으로 고생했던 세종은 병약한 아들 문종과 어린 단종이 늘 걱정되었다. 약한 자는 퇴출당할 수밖에 없는 궁궐은 약육강식 세계임을 아버지 태종을 통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세종이었다.

세종의 우려대로 아버지 문종이 즉위 2년 만에 세상을 떠나면서 단종은 즉위하였지만, 정치적 야욕에 불타있는 숙부 수양대군의 힘을 잠재우기엔 너무 어렸다. 단종이 즉위한 지 2년도 채 되지 않은 1453년 수양대군은 계유정난을 일으켰고 세종의 부탁으로 단종을 보필하던 김종서, 황보인 등 주요 대신들이 안평대군을 추대하려 했다는 역모를 꾸민 것으로 몰아세워 대부분 숙청했다. 결국, 궁에서 벌어지는 피바람 속에서 아무런 힘도 쓸 수 없었던 단종은 세조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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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릉을 보기위해 해마다 많은 사람들이 영월을 찾는다.

이후 벌어진 사건들은 너무나도 유명하다. 1456년 6월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등 이른바 사육신은 단종의 복위 운동을 꾀하다가 발각되어 처형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반역을 꾸민 죄로 붙잡힌 성삼문과 박팽년 등은 사정전으로 압송되었고 세조는 이들을 국문(鞠問)했다. 세조의 국문에도 성삼문과 박팽년은 굴하지 않고 “옛 임금을 복위하려 함이라, 천하에 누가 자기 임금을 사랑하지 않는 자가 있는가. 어찌 이를 모반이라 말하는가. 나의 마음은 나라 사람이 다 안다. 나으리가 남의 나라를 도둑질하여 뺏으니, 성삼문이 신하가 되어서 차마 군부(君父)의 폐출되는 것을 볼 수 없어서 그러한 것이다. 나으리가 평일에 곧잘 주공(周公)을 끌어댔는데, 주공도 이런 일이 있었는가. 성삼문이 이 일을 하는 것은 하늘에 두 해가 없고, 백성은 두 임금이 없기 때문이라.”라 말하는 절개를 보인다. 세조를 ‘나으리’라 칭하며 끝까지 왕으로 인정하지 않은 그들의 태도에 결국 세조는 칼을 빼들었다.

단종 역시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강원도 영월로 유배를 떠나야 했다. 유배를 떠난 후엔 안평대군과 왕권 쟁탈에서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금성대군까지 복위 계획을 세우다 발각되어 제거됨으로써 단종 역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역사는 승리자의 것이라는 유명한 말처럼 단종의 죽음을 둘러싸고 온갖 추측이 난무하지만 정확한 기록은 찾아보기 힘들다.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고 죽는 순간까지 괴로운 삶을 보냈던 단종이었기에 그를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만이 맴돌 뿐이다.


[트래블아이 왕릉 체크포인트]
왕이 하루 안에 참배할 수 있도록 수도권 내에 위치한 다른 조선왕릉에 비해 단종의 영월장릉(莊陵)은 서울에서 차로 3시간 정도 떨어진 강원도 영월에 있다. 조선 시대 영월로 능행차를 한다는 것은 사실상 힘든 일이었다. 한동안 단종이 잠든 무덤은 그 위치조차 찾을 수 없었으며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세상을 떠난 지 200여 년이 흐른 1698년 숙종 때 그는 비로소 복위될 수 있었다.

영월장릉의 봉분에는 병풍석이나 난간석도 없으며, 석물 또한 단출하다. 사각형으로 조각된 장명등과 각각 1쌍씩 세워진 문인석과 석마(石馬)가 전부다. 다만 능의 아래쪽에는 단종을 위해 절개를 지키다 단종을 따라 세상을 떠난 충신 32인의 위패를 비롯해 총 264인의 위패를 모신 장판옥(藏版屋)이 홀로 남겨진 단종을 위로하고 있다. 매년 4월 마지막 주 단종문화제 때는 단종의 충신들을 위한 제향이 올려진다. 영월장릉 주변엔 단종의 넋을 위로하는 공간이 또 하나 있다. 바로, 배견정이다. 단종을 모시던 시녀들은 단종이 죽자 동강의 절벽에 떨어져 자살했는데 그 시녀들의 넋이 두견새가 되어 단종의 능을 향해 울며 절하던 곳이라 하여 배견정이라 불린다고 한다. 세월이 지나 대부분의 조선왕릉 주변은 많은 개발로 옛 모습을 잃었지만, 단종이 쓸쓸히 생을 마감했던 영월장릉은 여전히 그가 떠났던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 더 애틋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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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도 한참이나 떨어진 영월에는
어린나이에 모진 일들을 겪었던 단종의 안타까움이 잠들어 있습니다.

트래블투데이 편집국

발행2015년 07월 17 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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